대원군은 왕궁 공사를 중지시키는 등 과거에 범했던 오류를 극복하여 봉건적 개혁정치를 펼치려 하였지만 이미 제국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던 일본과 청의 내적 변화를 미처 파악하지 못하였다.
일본군과 청군이 제각기 자국의 이익과 관련해서 우리나라로 들어오자 민씨 척족세력과 개화파는 이들
1876년 개항은 그를 계기로 ꡐ소농사회의 성숙ꡑ으로 그 발전방향이 집약되던 조선 농촌경제에 그와 전혀 상이한 유형의 서유럽적 근대가 접합되기 시작하였다는 점에서 진정 한국적 근대의 출발을 알리는 起點으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잘 알려진대로, 개항이 가져다 준 세계시장은 일본에
1882년 6월 서울에서 일어난 임오군란(임오군란)은 1876년의 개항, 1884년의 갑신정변,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 등에 비해 크게 주목을 받고 있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 동안의 연구가 임오군란의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외교사 부분에만 치중되어
대원군을 조선사 일대인물로 선정한 이유 첫째가 여기에 있다. 첫째, 그는 앞을 내다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좋게 말해서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이었고, 어떻게 보면 겉과 속이 다른 그런 교활한 사람이었다. 보고서 첫 장의 인용문과 같이 상갓집의 개라 불리며 안동 김씨 세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
9급공무원시험대비 국사핵심요약정리
요약1. 한국사의 이해
역사의 의미
객관적 의미의 역사 : 사실, 수많은 과거 사건들의 집합체, 랑케, 이병도, 실증주의사관
주관적 의미의 역사 : 기록, 조사되어 기록된 자료, 크로체, 콜링우드, 상대주의사관
※카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
이미지도 가지고 있다.
이에 본 조는 과연 이러한 기존의 일반적인 통념과 이미지가 맞는 것인지 또한 그들의 권력 싸움이 조선 시대 몰락 과정에 어떠한 영향을 분명히 주었을 것이란 생각에 이들의 대립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 ‘임오군란’을 중심으로 그것이 어떠한 것인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대원군이 대원군에 올라 운현궁에서 국정 전반의 일들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이른바 섭정의 지위에서 물러난 후에도 백성들이 가장 신뢰하던 정치인이었다. 임오군란 직후 청나라에 끌려가 3년 뒤 환국했을 때에는 대원군을 환영하기 위해 모인 서울시민이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였다고
대원군(興宣大院君)이 민씨 세력과 유림들의 연합공격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나는 과정을 목격하기도 했다. 대원군은 고종이 등극하던 1863년부터 10년 동안 강력한 통치권자로 군림하였다. 외척의 폐단을 극도로 경계하여 몰락한 가문에서 며느리를 들였으나, 결국 그에 의하여 권력의 정상에서 물러나
1. 19C 국제정세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
국제관계사에서 19세기의 세계는 흔히 영국과 러시아의 대결시대(英露對決時代)라고 일컬어진다. 나폴레옹 타도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영국과 러시아가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그 뒤로 양국의 패권을 다툰 데서 비롯된 말이다. 러시아가 발칸과 중앙아시아, 동아
도착한 하나부사는 7월 7일 고종을 알현한 자리에서 7개항의 요구사항을 제출하고 3일 내로 회답할 것을 통고했다.
한편 6월 18일 주일공사 리수창의 통지를 통해 군란 소식을 접한 청 또한 재빠르게 군대를 파견했다. 7월 7일 남양만 마산포에 도착한 청군은 서울로 들어와 13일 대원군을 전격